서울의 월스트리트, 테헤란로의 새로운 정체성
1980년대 이란과의 우호 관계를 기념해 명명된 테헤란로가 40년이 지난 지금, 전혀 다른 의미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역에서 강남역까지 이어지는 2.3km의 이 거리는 이제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매일 아침 8시, 이 거리의 카페들은 노트북을 펼친 청년 창업가들로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그들의 화면에는 투자 유치 프레젠테이션, 코딩 화면, 글로벌 시장 분석 데이터가 번갈아 나타난다.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2025년 테헤란로 반경 1km 내 스타트업에 유입된 투자금은 3조 2,4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국 벤처투자의 42%에 해당하는 수치다. 서초동의 법조타운, 여의도의 금융가와 함께 강남은 이제 스타트업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왜 창업가들은 평당 임대료가 15만원을 넘는 이 비싼 거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유니콘의 요람: 왜 모두가 테헤란로를 향하는가
"투자자를 만나러 가는 데 지하철 두 정거장이면 됩니다. 그게 테헤란로의 가장 큰 매력이죠." AI 스타트업 '딥브레인AI'의 장세영 대표는 테헤란로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역부터 역삼역까지 1km 구간에만 30개 이상의 벤처캐피탈과 액셀러레이터 본사가 밀집해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 알토스벤처스, DSC인베스트먼트 등 국내 대형 VC의 70%가 이 거리에 있다.
지리적 이점만이 아니다. 테헤란로는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킹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점심시간 역삼역 인근 식당에서는 서로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이 우연히 마주쳐 협업을 논의하는 장면이 일상이다. '뱅크샐러드'와 '토스'의 초기 협력도 이 거리의 한 카페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생태계라는 단어가 이보다 적확하게 들어맞는 곳을 찾기 어렵다.
테헤란로 스타트업 지도: 핵심 거점 5곳
-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 - 서울 강남구 역삼로 180 (역삼역 3번 출구 도보 3분) / 24시간 개방 코워킹 공간, 멘토링 프로그램 무료 제공
- D.CAMP (은행권청년창업재단) - 서울 강남구 선릉로 551 (선릉역 1번 출구 도보 5분) / 국내 최대 스타트업 지원 센터, 데모데이 월 2회 개최
- 팁스타운 S1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311 (역삼역 1번 출구 도보 7분) / 정부 지원 기업 전용 공간, 입주 시 최대 5억원 R&D 자금 지원
- 마루180 - 서울 강남구 역삼로 180 / 아산나눔재단 운영, 글로벌 네트워킹 특화
- 스파크플러스 선릉점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15 (삼성역 2번 출구 도보 4분) / 프리미엄 공유오피스, 월 45만원부터
투자 생태계의 변화: 돈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테헤란로의 투자 지형도는 지난 3년간 급격히 변했다. 과거에는 이커머스, 핀테크에 집중됐던 투자금이 이제는 AI, 딥테크, 바이오 분야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2025년 테헤란로 스타트업 투자 현황을 분석하면, AI·머신러닝 분야가 전체의 38%로 1위를 차지했고, 바이오·헬스케어가 22%, 기후테크가 15%로 뒤를 이었다. 불과 3년 전 1위였던 이커머스는 8%로 추락했다.
"시드 단계에서 시리즈A까지 평균 소요 기간이 14개월에서 9개월로 줄었습니다. 테헤란로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투자 결정 속도도 빨라진 겁니다." 알토스벤처스의 한 투자 심사역은 익명을 조건으로 이렇게 밝혔다. 투자자와 창업가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줄어들면서 신뢰 구축에 필요한 시간도 단축됐다는 분석이다.
테헤란로 출신 유니콘 기업 현황
2026년 1월 현재 테헤란로에서 탄생한 유니콘 기업은 총 12개다. 대표적으로 토스(기업가치 15조원), 야놀자(10조원), 무신사(3조원), 컬리(2조5천억원) 등이 있다. 이들 모두 창업 초기 테헤란로에서 첫 사무실을 열었고, 지금도 본사를 이 거리에 두고 있거나 강남권 내에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25년에만 '뤼튼테크놀로지스'와 '스켈터랩스' 두 AI 기업이 새롭게 유니콘 대열에 합류하면서 테헤란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스타트업 창업가의 하루: 테헤란로 24시
새벽 6시, 선릉역 인근 '블루보틀 강남점'에는 이미 노트북을 편 창업가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미국 서부 시간대 투자자와 화상 미팅을 위해서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 6,500원이 부담스럽지만, 안정적인 와이파이와 전원 콘센트, 그리고 조용한 환경은 사무실 월세를 아끼는 초기 창업가에게 필수다.
오전 9시, 역삼역 인근 '스파크플러스'와 'D.CAMP'의 공유오피스들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띤다. 이곳에서는 매일 최소 3건 이상의 투자 미팅이 이뤄진다. 점심시간에는 '역삼동 칼국수 골목'과 '학동역 먹자골목'이 스타트업 종사자들로 붐빈다. 8,000원짜리 칼국수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수십억원 규모의 계약이 논의되기도 한다.
오후 6시 이후, 테헤란로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역삼역 인근 주점과 카페에서는 '스타트업 네트워킹'이라는 이름의 술자리가 열린다. 매주 목요일 저녁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주관 네트워킹 행사에는 평균 150명이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맺어진 인연이 공동 창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창업가를 위한 테헤란로 서바이벌 가이드
- 저렴한 미팅 장소: 스타벅스 강남R점(역삼역 1번 출구) - 지하 회의실 무료 이용 가능(2시간 한정)
- 심야 작업 명소: 탐앤탐스 선릉역점 - 24시간 운영, 콘센트 좌석 다수
- 합리적 식사: 역삼동 백반 골목(역삼역 4번 출구 도보 3분) - 7,000~8,000원대 한식
- 투자자 미팅: 포시즌스 호텔 라운지(삼성역) - 시리즈B 이상 대형 딜 전용
- 무료 업무 공간: 서울창업허브 강남(역삼동) - 사전 예약 시 무료, 02-2222-3941
테헤란로의 그림자: 치열한 생존 경쟁의 이면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스타트업 전문 데이터 플랫폼 '혁신의숲'에 따르면, 2024년 테헤란로 일대에서 폐업한 스타트업은 847개로 전년 대비 23% 증가했다. 투자 혹한기가 길어지면서 시리즈A를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기업이 급증한 것이다. 평균 창업 후 폐업까지 소요 기간은 2년 3개월. 꿈을 안고 테헤란로에 입성했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창업가가 매달 70명에 달한다.
"테헤란로는 양날의 검입니다. 성공하면 최고의 네트워크를 얻지만, 실패하면 비싼 임대료가 치명타가 됩니다." 3번의 창업 실패를 경험한 김모(38) 씨의 고백이다. 그는 테헤란로 공유오피스 월세 120만원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성수동으로 옮겼다. 최근에는 성수동, 을지로, 망원동 등 이른바 '힙플레이스'로 스타트업이 분산되는 추세다. 임대료 부담과 함께 젊은 MZ세대 인재들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이동하려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한다.
2026년 테헤란로의 미래: 변화의 기로에 선 생태계
테헤란로는 분명한 변곡점에 서 있다. 글로벌 투자 위축, 국내 경기 침체, 그리고 대체 지역의 부상이 위협 요인이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있다. 강남구청은 2025년 말 '글로벌 스타트업 특구' 지정을 추진 중이며, 외국인 창업자에게 5년간 법인세 50% 감면 혜택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미 동남아시아와 인도 출신 창업가들의 테헤란로 진출이 늘고 있다.
무엇보다 테헤란로의 진정한 경쟁력은 '사람'에 있다. 40년간 축적된 네트워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문화, 그리고 빠른 의사결정 구조는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는 자산이다. 삼성역 교차로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미래의 유니콘을 꿈꾸는 수천 명의 눈빛을 마주할 수 있다. 그 눈빛이 꺼지지 않는 한, 테헤란로는 여전히 한국 스타트업의 심장으로 뛸 것이다.
인사이더 팁 3가지
1. 매월 첫째 주 목요일 오후 7시, 'D.CAMP 데모데이'는 누구나 무료 참관 가능하다. 유망 스타트업 발굴과 투자자 네트워킹의 최고 기회다.
2.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의 'Startup Grind' 행사(격주 화요일)에서는 유니콘 창업자들의 생생한 실패담을 들을 수 있다.
3. 테헤란로 스타트업 채용 정보는 '원티드' 앱에서 '테헤란로' 태그를 검색하면 실시간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