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월스트리트, 테헤란로가 다시 들썩인다
강남역 11번 출구를 나서면 공기가 다르다. 정장 차림의 직장인 사이로 후드티에 백팩을 멘 청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노트북이 들려 있고, 입에서는 '시리즈A', 'PMF', '런웨이'같은 단어가 쏟아진다. 테헤란로 2km, 이 짧은 거리에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2026년 1월 현재, 테헤란로 일대에는 약 2만 개의 스타트업이 운집해 있다. 강남구청 자료에 따르면 역삼동과 삼성동을 잇는 이 지역의 기술 기반 창업기업 수는 지난 5년간 47% 증가했다. 글로벌 투자 혹한기 속에서도 이곳만은 예외다. 무엇이 이 거리를 한국 혁신의 심장부로 만들었을까.
15년간 강남을 취재해온 기자로서 단언컨대, 테헤란로의 진짜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에 있다. 반경 500m 안에 벤처캐피털, 엑셀러레이터, 법무법인, 회계법인, 그리고 수천 명의 창업자가 밀집해 있다. 점심 한 끼에 투자 미팅이 성사되고, 저녁 술자리에서 공동창업자를 만난다. 이 '우연의 밀도'야말로 실리콘밸리도 부러워하는 테헤란로만의 자산이다.
투자 혹한기를 뚫는 테헤란로 스타트업의 생존 전략
2023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투자 위축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칼바람을 몰고 왔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2025년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23% 감소한 6조 2천억 원을 기록했다. 시리즈B 이상 투자 유치에 성공한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테헤란로의 창업자들은 이 위기를 오히려 '체질 개선'의 기회로 삼고 있다.
역삼역 3번 출구 인근 '마루180'에서 만난 AI 스타트업 대표 김모(34) 씨는 "과거에는 외형 성장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철저히 수익성 중심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사는 2024년 매출 120억 원, 영업이익률 15%를 달성하며 투자 유치 없이도 지속 가능한 성장 궤도에 올랐다. "VC 돈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요즘 테헤란로의 트렌드"라는 그의 말에서 위기 속 역설이 느껴진다.
이른바 '좀비 스타트업'의 퇴장도 가속화되고 있다. 기업 데이터 분석 플랫폼 혁신의숲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테헤란로 일대에서 폐업한 스타트업은 약 1,200개에 달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한국벤처투자 관계자는 "거품이 빠지면서 진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부각되고 있다.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정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유니콘을 향한 질주: 테헤란로의 잠재적 강자들
2026년 현재 한국의 유니콘 기업은 23개. 이 중 18개가 테헤란로를 거점으로 성장했거나 현재 본사를 두고 있다. 쿠팡, 야놀자, 당근마켓, 토스—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들이 모두 이 거리에서 첫 발을 뗐다. 그리고 지금, 차세대 유니콘 후보군이 물밑에서 빠르게 성장 중이다.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단연 AI와 딥테크다. 역삼동 소재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퓨리오사AI'는 2025년 시리즈B 투자에서 800억 원을 유치하며 기업가치 1조 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삼성 출신 엔지니어들이 창업한 이 회사는 엔비디아에 도전장을 내민 '한국의 희망'으로 불린다. 선릉역 인근의 바이오 스타트업 '에이아이스페라'는 AI 기반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 글로벌 제약사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기후테크 분야도 급부상 중이다. 테헤란로 GS타워에 입주한 '에너지엑스'는 태양광 발전 효율을 30% 높이는 기술로 중동 시장을 공략 중이며, 2025년 수출액만 500억 원을 돌파했다. 대표 이모(41) 씨는 "테헤란로의 장점은 글로벌 투자자와 바이어를 만나기 쉽다는 것. 이 근처 호텔 로비에서 미팅 한 번 하면 계약이 성사된다"고 귀띔했다.
테헤란로 유니콘 후보 기업 TOP 5
- 퓨리오사AI (AI 반도체) - 기업가치 9,500억 원, 누적 투자 1,200억 원
- 에이아이스페라 (AI 신약개발) - 기업가치 7,000억 원, 글로벌 파트너십 12건
- 에너지엑스 (기후테크) - 기업가치 5,500억 원, 중동 수출 500억 원
- 머니브레인 (핀테크) - 기업가치 4,800억 원, MAU 350만 명
- 닥터나우 (헬스테크) - 기업가치 4,200억 원, 비대면 진료 시장 점유율 1위
테헤란로 스타트업 생태계 지도: 어디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테헤란로 스타트업 생태계는 지역별로 뚜렷한 특색을 지닌다. 강남역~역삼역 구간은 초기 스타트업의 요람이다. 저렴한 공유오피스와 소규모 액셀러레이터가 밀집해 있어 시드 단계 창업자들이 주로 포진한다. 대표적인 공간으로는 '마루180'(역삼로 180),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역삼로 165), '디캠프'(선릉로 551)가 있다.
역삼역~선릉역 구간은 시리즈A~B 단계 기업들의 격전지다. 월 임대료 평당 15만~20만 원 선의 프라임급 오피스가 즐비하며, 네이버, 카카오 출신 연쇄창업자들이 이끄는 기업들이 많다. 특히 테헤란로 415 일대는 '핀테크 거리'로 불리며, 토스, 뱅크샐러드, 카카오페이 등 금융 스타트업 본사가 밀집해 있다.
선릉역~삼성역 구간은 유니콘급 기업과 벤처캐피털의 영역이다. 삼성동 파르나스타워, 아셈타워에는 소프트뱅크벤처스, 알토스벤처스 등 국내외 유수 VC가 입주해 있다. 이 지역의 오피스 임대료는 평당 25만 원을 훌쩍 넘지만, "투자자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확률"을 고려하면 결코 비싼 값이 아니라는 게 창업자들의 중론이다.
인사이더 팁: 테헤란로에서 스타트업 네트워킹을 원한다면 매주 목요일 저녁 선릉역 '어반하이브' 1층 카페를 주목하라. 비공식적으로 '창업자의 밤'이 열리며, VC 심사역부터 예비창업자까지 다양한 인맥이 모인다. 드레스코드는 '캐주얼하되 명함은 필수'.
VC가 말하는 투자 유치의 비밀: 테헤란로에서 살아남는 법
투자 유치는 모든 스타트업 창업자의 숙원이다. 그러나 수천 개 기업이 경쟁하는 테헤란로에서 VC의 눈에 띄기란 쉽지 않다. 연간 1,000건 이상의 투자 제안서를 검토한다는 한 VC 파트너에게 '선택받는 스타트업'의 조건을 물었다.
"첫째, 창업자의 도메인 전문성입니다. 해당 분야에서 최소 5년 이상 경험을 가진 창업자에게 투자합니다. 둘째, 시장 규모와 타이밍. 아무리 좋은 기술도 시장이 작거나 너무 이르면 투자하지 않습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왜 당신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입니다." 매그나인베스트먼트 김태현 대표의 조언이다.
투자 미팅 성사율을 높이는 현실적 팁도 존재한다. 테헤란로에서 10년간 활동한 연쇄창업자 박모 씨는 "콜드메일보다는 포트폴리오 기업 대표의 소개가 10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테헤란로는 좁다. 평판이 곧 자산이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이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투자 유치 성공을 위한 체크리스트
- IR 자료: 10페이지 이내, 문제-해결책-시장-팀-재무 구조로 구성
- 트랙션: MAU, MRR, 전월 대비 성장률 등 구체적 수치 필수
- 팀 구성: CTO 없는 기술 스타트업, CEO 단독 운영은 감점 요인
- 경쟁사 분석: "경쟁사 없다"는 답변은 시장 이해도 부족으로 인식
- 자금 사용 계획: 모호한 '마케팅 강화'보다 구체적 집행 계획 제시
테헤란로의 미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6년 테헤란로는 전환점에 서 있다. 투자 혹한기가 장기화되면서 '돈 잔치'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위기가 생태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 '일단 키우고 보자'식 성장 신화에 매몰됐던 창업자들이 이제는 수익성과 지속가능성을 최우선에 두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 지원도 달라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6년부터 '딥테크 집중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하며, AI, 바이오, 우주항공 분야에 5년간 10조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강남구청도 테헤란로 일대를 '글로벌 스타트업 특구'로 지정하고 외국인 창업자 비자 간소화, 영어 행정 서비스 확대 등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은 남는다. 테헤란로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를 넘어 '글로벌 혁신의 허브'가 될 수 있을까? 스탠퍼드 출신으로 실리콘밸리에서 10년간 일한 뒤 귀국한 창업자 정모 씨는 신중한 낙관론을 펼친다. "테헤란로는 인재와 자본의 밀도에서 이미 세계적 수준입니다. 부족한 건 글로벌 마인드셋과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죠. 그러나 Z세대 창업자들을 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타겟으로 합니다."
현장 기자의 시선: 15년간 테헤란로를 취재하며 수많은 부침을 목격했다. 닷컴 버블 붕괴, 금융위기, 팬데믹—매번 위기가 올 때마다 '스타트업 생태계 붕괴'를 예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테헤란로는 늘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지금의 혹한기 역시 더 강인한 기업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이 거리의 저력을 얕보지 마라.
테헤란로 스타트업 탐방 가이드
스타트업 생태계를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다음 장소들을 추천한다. 예비창업자, 투자자, 취업 희망자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다.
주요 창업 지원 시설
- 디캠프 (선릉로 551) - 은행권청년창업재단 운영, 무료 공유오피스 및 멘토링 제공. 월~금 09:00~22:00, 선릉역 5번 출구 도보 3분.
- 마루180 (역삼로 180) -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운영, 초기 창업자 대상 프로그램. 역삼역 3번 출구 도보 5분.
-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 (역삼로 165) - 글로벌 네트워킹, 교육 프로그램 제공. 사전 예약 필수, campus.co에서 신청.
- 팁스타운 (역삼로 165) - 기술 기반 스타트업 집중 육성, 최대 5억 원 R&D 지원. 선발 경쟁률 20:1.
네트워킹 핫스팟
- 블루보틀 역삼점 (테헤란로 415) - VC 심사역과 창업자의 비공식 미팅 장소. 오전 8~10시 피크타임.
- 어반하이브 (선릉로 525) - 코워킹 스페이스 겸 카페, 목요일 저녁 창업자 네트워킹.
- GS타워 로비 라운지 - 대형 투자 미팅 전 대기 장소로 유명, 수트 입은 창업자 목격 다수.
교통 및 접근성
-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역삼역, 선릉역, 삼성역 모두 테헤란로 직접 연결
- 버스: 간선 146, 341, 360번 테헤란로 경유
- 주차: 대부분 건물 지하주차장 이용 가능, 시간당 3,000~5,000원. 역삼역 공영주차장(시간당 1,800원) 추천
테헤란로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다. 이곳은 꿈을 현실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이다. 실패와 성공이 교차하고, 절망 끝에 희망이 피어나는 곳. 다음 유니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테헤란로 어딘가의 좁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고 있을 것이다. 그 여정의 목격자가 되고 싶다면, 테헤란로로 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