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스카이라인 아래,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곳
코엑스몰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꺼지고 새벽 4시, 강남구 삼성동 한복판에서 낮고 깊은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794년 신라 원성왕 때 창건된 봉은사는 1,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다. 50층이 넘는 마천루들이 사찰을 에워싸고 있지만,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연간 200만 명이 찾는 이곳에서 매주 진행되는 템플스테이는 참가 신청 오픈 30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IT 스타트업 대표부터 수능을 앞둔 고3 학생, 퇴직 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60대까지. 봉은사 템플스테이에는 다양한 이유로 '멈춤'이 필요한 현대인들이 모여든다. 단순한 관광 체험이 아닌,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그 여정을 직접 걸어보았다.
프로그램 완전 해부: 당일형부터 심화 수행까지
체험형 템플스테이 (당일)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들을 위한 당일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된다. 참가비는 5만원이며, 사찰 안내와 예불 체험, 108배, 다도, 연꽃등 만들기 등이 포함된다. 점심 공양(사찰 음식)이 제공되며, 스님과의 차담 시간도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 참가자를 위한 영어 프로그램도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에 별도 운영된다.
휴식형 템플스테이 (1박 2일)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1박 2일 휴식형이다. 참가비 7만원으로 금요일 오후 3시 입재부터 토요일 오후 1시 회향까지 진행된다. 새벽 4시 도량석(새벽 예불을 알리는 의식)에 맞춰 기상한 뒤 새벽 예불에 참석하고, 좌선과 행선(걷기 명상)을 경험한다. 이곳의 발우공양은 특히 유명한데, 네 개의 나무 그릇에 밥과 국, 반찬, 물을 담아 먹은 뒤 깨끗이 씻어내는 의식이다. 음식 하나 남기지 않고 먹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다.
수행형 템플스테이 (2박 3일 이상)
보다 깊은 수행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집중 수행 프로그램은 2박 3일 12만원, 6박 7일 35만원으로 운영된다. 참선 수행에 집중하며, 스님의 지도 아래 화두 참구와 간화선을 배울 수 있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집중 안거 체험'도 진행되어 실제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 참가 전 전화 상담이 필수이며, 기본적인 좌선 경험이 있는 분에게 권장된다.
새벽 3시 30분, 고요 속에서 만난 나 자신
기자가 직접 참여한 1박 2일 템플스테이. 스마트폰을 반납하고 회색 수행복으로 갈아입는 순간부터 일상과의 단절이 시작됐다. 배정받은 방은 6인실 온돌방. 얇은 이불과 작은 베개가 전부였지만, 오히려 그 단출함이 편안했다. 저녁 예불 후 소등 시간인 밤 9시, 도심의 밤이 시끄럽게 시작될 때 사찰은 고요 속으로 잠겼다.
새벽 3시 30분, 죽비 소리에 잠을 깼다. 찬물에 세수하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108배를 시작할 때는 온몸이 뻣뻣했지만, 50배를 넘어가자 이상하게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108배를 마친 뒤 새벽 예불에 참석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목탁 소리와 스님들의 독경이 온몸을 감쌌다. 종교가 없는 기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무언가 거대한 것 앞에 서 있다는 경외감이 밀려왔다.
좌선 시간이 가장 어려웠다. 40분간 움직이지 않고 앉아 호흡에 집중하는 것. 처음 10분은 다리가 저려 미칠 것 같았고, 다음 10분은 온갖 잡념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20분을 넘어가자 신기하게도 생각들이 잦아들었다. 지도 스님은 말했다. '생각이 떠오르면 잡지도 말고 밀어내지도 마세요. 그냥 흘려보내면 됩니다.' 그 짧은 가르침이 오래도록 남았다.
봉은사 템플스테이, 이것이 다르다
전국 130여 개 사찰에서 템플스테이가 운영되지만, 봉은사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첫째, 도심 접근성이다.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삼성역 6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퇴근 후 바로 참여할 수 있다. 둘째, 전문 지도 스님의 상주다. 봉은사에는 템플스테이 전담 스님이 3명 상주하며, 참가자 개인별 상담도 진행한다. 셋째, 1,200년 역사의 문화재급 공간에서 수행한다는 점이다. 보물 제321호 판전을 비롯해 미륵대불(23m 높이의 국내 최대 석조 불상), 고려대장경을 보관한 판전 등을 거닐며 수행할 수 있다.
특히 봉은사는 선농단(禪農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몇 안 되는 사찰이다. 사찰 뒤편 텃밭에서 직접 채소를 가꾸고 수확하는 체험으로, 노동과 명상을 결합한 프로그램이다. 흙을 만지며 땀 흘리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된다. 봄철에 한정 운영되며, 별도 신청이 필요하다.
예약부터 준비물까지: 실전 가이드
예약 방법
- 온라인: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templestay.com) 또는 봉은사 공식 홈페이지(bongeunsa.org)
- 전화: 02-3218-4826 (템플스테이 사무국, 평일 09:00~18:00)
- 예약 오픈: 매월 1일 오전 10시 익월 프로그램 오픈 (인기 일정은 10분 내 마감)
- 취소 규정: 3일 전까지 전액 환불, 당일 취소 시 환불 불가
필수 준비물
- 개인 세면도구 (칫솔, 치약, 수건)
- 따뜻한 양말 (법당은 맨발 입장, 바닥이 차가움)
- 얇은 긴팔 상의 (수행복 안에 입을 내복류)
- 개인 물병 (일회용 컵 사용 금지)
- 필기도구 (스님 법문 중 메모용)
복장 안내
사찰 도착 후 제공되는 회색 수행복으로 갈아입는다. 편한 면 바지와 긴팔 티셔츠를 안에 입으면 좋다. 짧은 치마나 노출이 심한 옷은 삼가야 한다. 수행복은 세탁된 상태로 제공되며, 퇴실 시 수거함에 반납한다.
교통 및 주차
-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 도보 5분 / 2호선 삼성역 6번 출구 도보 10분
- 버스: 봉은사 입구 정류장 하차 (간선 146, 341, 360, 740번 등)
- 자가용: 네비게이션 '봉은사 주차장' 검색. 템플스테이 참가자 무료 주차 (입재 시 주차권 발급)
-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73)
15년 강남 취재 기자가 전하는 인사이더 팁
첫째, 금요일 저녁 입재를 노려라. 토요일 아침 시작 프로그램보다 금요일 오후 입재가 훨씬 여유롭다. 저녁 예불부터 참여하면 사찰의 밤 풍경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고, 다음 날 새벽 예불도 덜 힘들다. 퇴근 후 바로 오는 직장인들이 많아 같은 처지의 참가자들과 유대감도 생긴다.
둘째, 미륵대불 앞 일출 명상을 놓치지 마라. 공식 프로그램에는 없지만, 새벽 예불 후 미륵대불 앞 공터에서 일출을 맞는 것을 추천한다. 23미터 높이의 거대한 불상 뒤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도 스님께 미리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신다.
셋째, '스님과의 차담' 시간을 적극 활용하라. 많은 참가자들이 수줍어서 질문을 못 하는데, 이 시간이야말로 템플스테이의 핵심이다. 삶의 고민, 마음의 문제를 솔직히 여쭤보라. 스님들은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온 분들이다. 종교적 답변이 아닌, 삶의 지혜를 나눠주신다.
넷째, 봉은사 뒤편 산책로를 걸어라. 사찰 뒤쪽으로 수도산 산책로가 이어진다. 30분 정도의 가벼운 산책 코스인데,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숲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행선(걷기 명상)을 혼자 실습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오후 자유 시간에 꼭 걸어보라.
다섯째, 재참가자 할인을 활용하라. 봉은사 템플스테이를 한 번 경험한 뒤 재참가하면 10% 할인이 적용된다. 또한 연간 회원권(연 4회 참가 가능, 25만원)을 구매하면 1회당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정기적인 '마음 정비'가 필요하다면 고려해 볼 만하다.
템플스테이 후기: 참가자들의 목소리
'스타트업 대표로 5년, 늘 달리기만 했습니다. 템플스테이 이틀 동안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어요. 역설적으로, 그 멈춤이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습니다.' - IT 스타트업 대표 김모(38)씨
'수능 100일 전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왔어요. 솔직히 처음엔 짜증났는데, 새벽 108배 끝나고 마음이 이상하게 고요해졌어요. 지금도 시험 전날엔 108배를 해요.' - 대학생 이모(20)씨
'퇴직 후 우울증이 왔었어요. 봉은사 템플스테이를 월 1회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 2막이 여기서 시작됐어요.' - 전직 회사원 박모(62)씨
자주 묻는 질문 (FAQ)
Q. 종교가 없어도 참여할 수 있나요?
A. 물론이다. 참가자의 60% 이상이 불교 신자가 아니다. 종교 권유는 전혀 없으며, 명상과 힐링 프로그램으로 접근해도 무방하다.
Q. 외국인 친구와 함께 가도 되나요?
A.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에 영어 프로그램이 별도 운영된다. 일반 프로그램 참여 시에도 영어 안내 자료가 제공된다.
Q. 채식만 먹나요?
A. 그렇다. 사찰 음식은 육류, 어패류, 오신채(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사용하지 않는다. 알레르기가 있다면 사전에 알려주면 배려해 준다.
Q. 아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나요?
A. 여름, 겨울 방학 시즌에 '가족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초등학생 이상 참여 가능하며, 가족당 15만원이다.
맺음: 멈춤의 미학
봉은사 템플스테이는 화려한 여행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도, 푹신한 침대도, 스마트폰도 없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발견한다. 24시간 연결된 세상에서 의도적으로 단절되는 것. 끊임없이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호흡을 듣는 것. 그것이 이 시대 가장 값진 사치인지도 모른다.
코엑스의 불빛이 반짝이는 강남 한복판에서, 1,200년 된 사찰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 봉은사 템플스테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